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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 일제 강점기 과정, 근대 한국사

해외 한인들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해외 한인들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해외 한인들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해외 한인들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해외에서는 중국의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미국, 하와이, 멕시코에서 국내의 3. 1 운동에 부응하여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동북지역 북간도에서는 원래 러시아 한인의 최고 중앙기관인 전로 한족 중앙총회의 주최로 1919년 2월 25일에 개최된 노 중령 독립운동단체 대표회의의 결정에 따라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 기독교 전도사 정재면, 중국 권학소 학무원 이중 집 등이 연해주로 파견되었다. 그러던 중 3월 7일 국내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3월 13일 정오 12시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용정촌 북쪽의 서전(瑞甸) 벌에서 명동학교, 정동 학교, 대성학교, 동흥 학교, 은진중학교 등의 학생들과 일반 동포 약 3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조선독립 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회장 김영학이 '간도 거류 조선민족 일동' 명의로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하였고, 포고문의 낭독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천지가 진동하도록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대회에 참석한 군중들은 일본 총영사관이 있는 용정 시내로 행진을 하였는데, 맨 선두에는 명동학교와 정동 학교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320명의 충렬 대가 '대한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나섰고 그다음으로 북과 나팔을 멘 악대가 따랐으며, 수많은 군중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압력과 개입을 두려워한 중국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하루 전인 3월 12일 일본 영사관과 일본 거류민을 보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연길(延吉) 도윤(道尹) 장세전(張世銓)은 한인들의 '독립 축하회' 탄압을 결정하고, 맹부덕(孟富德)을 총지휘관으로 한 군경을 용정으로 파견하였다. 맹부 덕은 일본 총영사관을 향해 행진하던 시위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13명이 희생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치명상을 입은 4명이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에 사망함으로써 모두 17명이 순국하였다. 이들 3․13 시위운동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3월 17일 5천여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이렇게 시작된 북간도에서의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은 옌지 현, 허룽현, 왕칭현, 훈춘 현, 둥닝현의 각처에서 4월 말까지 계속되었는데 총 54회의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101,470명에 달하였다. 한편 서간도 지역에서도 독립의 소식이 전해져서 3월 12일 유하현 삼원포에서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200여 명의 한인들이 독립선언 경축대회를 개최하였다. 같은 날 통화현에서도 한인 300여 명이 금두화락 교회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통화현에서는 3월 20일까지 만세시위운동이 계속되었다. 백두산 동쪽의 안도현(安圖縣), 무송현(撫松縣), 장백현(⾧⽩縣), 집안현(輯安縣), 환인현(桓仁縣) 등지에서도 '독립선언 축하식'과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전로 한족 중앙총회 주도로 2월 25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노 중령 독립운동 단체 대표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는 러시아 각지와 동북지역은 물론이고 국내로부터 건너온 대표들까지 참여하였다. 대회에서는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갈 임시정부 성격의 중앙기관의 창설, 독립선언서의 발표, 시위운동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에 따라 대한 국민의회(⼤韓國民議會)를 조직하였다. 3월 8일 국내로부터 러시아 기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온 동포들에 의하여 국내에서의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졌다. 당초 대한 국민의회는 3월 15일 독립선언식과 가두시위운동을 러시아 당국(백 위파 옴스크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아 진행하기로 하고, 3월 14일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한인 가옥에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그러나 백 위파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일본 정부의 압력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계엄령을 내렸고 대한 국민의회와 블라디보스토크 한민 회에는 폐쇄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당국은 일본과의 국교관계를 해치는 일체의 행위를 엄금하겠다는 명령도 내렸다. 결국 대한 국민의회는 러시아 정부(옴스크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 진행하려던 당초 계획을 포기하였다.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3월 17일 오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하고,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와서 독립 선언과 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날 한인 상점과 학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오후 3시 한인 청년들은 일본 총영사관을 찾아가 러시아어와 한글로 작성된 대한 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부에 전달해 달라는 요청서와 함께 전하였다. 이와 동시에 11개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공서에도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오후 4시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되었으며, 대한 국민의회 주최로 2만여 명의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한인들은 큰 거리로 나와서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해가 저문 오후 6시부터는 문창범의 지휘로 청년, 학생들이 시내로 나가서 자동차 3대와 마차 2대에 나눠 타고는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과감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 총영사는 러시아 연해주 군사령관과 주(州) 장관에게 문창범의 체포와 시위운동 금지를 요구하였다. 오후 7시 반에 이르러 러시아 관헌들이 시위운동을 금지하면서 시위학생들을 체포하고 신한촌의 태극기를 모두 끌어내리게 하였다. 일본과 러시아 당국의 탄압에 항거하여 다음날인 3월 18일 한인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단행하고 신한촌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사할린에서는 3월 16일에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스파스크(3월 18일), 라즈 돌리 노예(3월 21일), 그리고 하바롭스크, 노보시키예프스크 등지에서도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4월 5일에는 두만강 하구의 녹도(크라스노 예셀로)에서, 4월 9일에는 구사평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미주지역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

3월 9일 상해의 현순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 총회장 안창호 앞으로 전보를 보내 3·1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안창호는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파리 강화 회의 파견 대표인 이승만과 정한경에게 3·1 운동 소식을 전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영자신문에도 현순의 전보 복사 문을 돌렸다. 저녁 7시 30분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개최된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3·1 독립선언 소식을 접한 한인들이 모여 만세를 열창하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도 현순의 전보를 받고 한인교회에 한인 6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필라델피아 시내의 리틀 극장에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한인 자유대회가 개최되었다. 한인 120여 명이 참석하고 미국인 목사, 신부, 유대교 랍비, 대학총장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 지원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려서 미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목표였다. 강연과 토론을 영어로 진행한 이 대회는 회의록을 간행하여 미국인 대중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강연에서 자유를 향한 한국 민족의 요청에 동정과 지지를 표시하였으며 폭군적인 일본의 동기와 행위들을 규탄하였다. 이들은 미국적인 민주주의, 자유, 기독교의 가치를 칭송하였고, 미국이 정의와 자유를 얻은 승리자로서 한국을 도울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회에 참가한 한인 대표들은 「미국에의 호소문」을 채택하였는데, 국내에 있는 1천8백만 한민족을 대표한다고 자임하였다. 호소문에서 이들은 “미국인들 역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고 기독교 사상과 인류애의 편에서 정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지와 동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우리의 주장은 신과 인간의 법 앞에 정당한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군국주의적 독재정치로부터의 자유이고, 우리의 목적은 아시아의 민주주의 화이며, 우리의 희망은 전 세계적인 기독교화이다”라고 하였다. 대회 참가자들은 대회 마지막 날 기마대와 악단을 앞세우고 행진을 하여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조인된 독립관(Independence Hall)에 집결하였다. '대한 공화국 임시정부'의 '국무경'의 자격으로 이승만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서명했던 헨콕(John Hancock)이 앉았던 자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hington)이 앉았던 자리에서 독립 관장의 환영사를 들었으며, 영문으로 된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